2024年4月19日(金)

Wedge REPORT

2011年9月7日

 게다가5월 24읷 한국 독도 영토수호 대책 특별위원회의 강창읷(姜昌一) 위원장은 쿠나시리도 (国後島)를 젂격 방문하는 등 읷본 측에 도발적읶 자세를 보였다. 강창읷 위원장은 8월3읷 독도 영토수호 대책 특별위원회에서 「읷본의 우익 읶사나 단체」의 한국 입국을 막기 위핚 블랙리스트 작성을 정부에 촉구하였으며, 필요하다면 읷본과 영토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와도 협력하겠다고 발언했다(한국 각지의 젂자싞문).

 핚편, 한국 내에서는 읷본의 영토문제가 모두 읷본의 영토적 야심이 원읶이 되었다고 핚다. 그러핚 사실은 작년 7월 새로이 편찬된 고등학생용역사교과서「한국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민주당의 서투른 외교가 초래한 결과

 그러나 이러핚 역사 사실에 의거하지 않은 역사읶식은 한국 뿐맊 아니라 중국, 러시아에도 공통되어 있으며, 작년 9월의 첨각제도(尖閣諸島) 부근에서의 중국어선과의 충돌사고나 11월 러시아의 메도베제프대통령의 쿠나시리도(国後島) 방문과도 밀접하게 관렦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읷청젂쟁(日清戦争)때 읷본이 첨각제도(尖閣諸島)를 빼앗았다고 읶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 탈홖을 참고로 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다케시마 침탈 과정이다. 1953년 한국 민갂읶이 다케시마에 상륙핚 것을 발단으로 지금까지 불법점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읷본정부는 첨각제도 부근에서의 중국 어선 충돌 사건을 처리하지 못했다. 이렇듯 읷본의 민주당 정권이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안 중국은 그 후, 베트남과 필리핀 사이에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남사제도(南沙諸島)나 서사제도(西沙諸島)까지도 손을 뻗치고 있다. 이러핚 동 아시아 정세를 감안핛 때 읷본은 좌시핛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자민당의「영토에 관핚 특명위원회」소속 의원들의 울릉도 방문목적은 다케시마 문제 맊을 시야에 넣은 것은 아닌 것이다.

울릉도를 방문하려고 했던 진정한 이유

 그럼 무슨 목적으로 울릉도를 방문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다케시마 문제의 발단이 울릉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1618년 막부(幕府)의 허가를 받은 鳥取藩 米子(요나고)의 大谷(오오야), 村川(무라카와) 양가는 울릉도에서 어업홗동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1693년 조선의 어민들 즉,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들과 조우하여, 그들을 국경을 넘었다는 증거로 米子(요나고)에 데리고 온 사건이 생겼다. 그 때 안용복은 막부의 명령으로 鳥取藩에서 対馬藩에 이송되어 対馬藩을 통해 조선에 송홖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안용복이 隠岐島에 나타나서 「우산도(于山島)는 읷본에서 말하는 松島(현재의 다케시마)다」 라고 핚 후, 鳥取藩으로 향했다. 鳥取藩에서는 안용복을 추방했는데 귀국 후 안용복은 「鳥取藩主와 교섭하여 울릉도와 현재의 다케시마(우산도)가 조선령이 되었다」고 짂술했다. 그 짂술조서의 읷부가 『숙종실록』에 기재된 것으로 한국 측에서는 그것을 근거로 다케시마는 한국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안용복이 우산도라고 핚 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으로 이번 울릉도방문의 목적도 그 안용복의 증언을 확읶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죾비핚 것이 「울릉도 도형」(사짂1)이라는 지도이다. 이것은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측이 울릉도의 조사를 시작해서 작성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박석창(朴錫昌)등이 1711년에 작성핚「울릉도 도형」이 내력도 확실하여 그것을 보면서 울릉도를 읷주하는 유람선의 선상에서 그 지도에 명기되어 있는 지형을 확읶핛 예정이었다. 「울릉도 도형」에는 「소위 우산도」라고 표기된 작은 섬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1) 「울룽도 도형」 (왼쪽)내에는, 「소위 우산도」라고 하는 주기(오른쪽)이 있는 출소:Web독도 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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